d e a d r o s e
Another RicMin part of ROADS
Written by birdie
4.
『너, 나랑 사귀자.』
『뭐…?』
반문을 하는 민우의 눈이 가늘어지며 특유의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혜성은 오히려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물론 먹힐 리 없었지만.
정말 못 들은 걸까? 늬엿늬엿 힘없이 물들어가는 석양을 보며,
혜성도 민우도 잠시 불편한 침묵에 빠졌다.
『차라리 우리 둘이 사귀자고. 그게 나을 것 같아.』
『…………. 』
『미안, 헛소리야. 난-』
혜성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방과후의 조용한 학교는 이젠 스산
하기까지 했다. 제법 가을 티를 내는 바람이 시원하게 둘의 이마에
와 닿았다. 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청아한 물내음이 다가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막연한 갈증에 혜성은 교복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
하게 풀었다. 심심하니까 재밌게 놀아달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 것은 혜성이었고 그런 혜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과후
학교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민우였다. 혜성은 자신을 배려
해주는 민우에게 어느 정도의 처연함을 느꼈고, 민우는 쓸데없이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혜성에게 오히려 더 미안할 수 밖에 없었다.
『목이 말라.』
난간에 기대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혜성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다. 자신으로부터 네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있는
민우라 설마 들었을까 했는데 민우는 바로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서더니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바스락거리는 비닐에 싸인 하얀
박하사탕을 내밀었다.
『……목 마른데 사탕을 먹으라고?』
이민우 주머니에서 사탕이 나온 것도 놀라운 일인데, 상황에 맞지
않게 나오는 사탕이라 더 황당했다. 그래도 혜성은 포장을 벗겨
입안에 밀어넣고는 혀로 굴려 빨아먹기 시작했다. 은근하게 퍼지는
박하향이 청량하기는 했다.
『하도 속이 쓰려서 사탕이라도 먹으면 괜찮을까 싶었는데,
더 쓰리더라. 그래도 맛은 있던데.』
『응, 달다.』
『난, 쓰더라.』
그렇게 말하며 민우는 혜성의 얼굴을 마주보고는 아련하게 웃어
버렸다. 혀 위에서 반쯤은 녹은 사탕의 맛이 그 웃음을 보는 순간
그제서야 쌉쌀하게 느껴졌다. 박하사탕의 싸한 그 향과 맛은 눈물나
게도 민우를 닮아있었다.
몇몇의 수근대는 시선을 느끼면서 겨우 룸을 하나 잡았다. 슬쩍 살펴본 민우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오히려 정혁은 그런 민우의 얼굴이 더 불안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호수를 찾아 소음을 먹는 푹신한 카페트를 밟으며 문 앞에 달했을 때 민우는 카드키를 든 정혁의 손을 잡았다. 민우가 무슨 소릴 할지는 뻔했다. 정혁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민우의 어깨를 잡아 끌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 벽에 밀쳤다. 이제야 아무도 없는 밀폐된 곳에 너와 함께 하게 됐어. 귓가에 흩뿌려진 정혁의 속삭임에 정신이 아찔해져 민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벽에 밀쳐진 채인 민우 앞으로 정혁이 바짝 다가와 섰다.
「널 보자마자 키스부터 하고 싶었는데…, 참았어. 시작하면 끝도 못 볼 테니깐. 해도 돼?」
입술부터 맞부딪치고 싶었지만 정혁은 좀 더 참고 민우에게 허락을 구했다. 녀석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물은 것이었지만 오히려 고개를 돌려 버린다. 정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민우의 옆 얼굴 선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움찔하던 민우가 그제서야 정면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의아함에 벌어진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고 지그시 눌렀다. 민우가 팔을 들어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것을 느끼고는 바로 혀를 집어넣었다. 얼마만의 키스인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여름 호숫가에서 온통 눈물범벅 소금기 어린 키스, 그 장렬했던 고백과 그만큼이나 엄숙했던 다짐. 친구가 되자고? 그게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어. 어째서 널 바라보는 것 조차 힘들었는지, 그러면서도 네가 보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이 그리웠는지,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쓰려왔는지. 이렇게 네게 입맞추고 있어도 죽을 것 같이 힘들어.
한 번 시작한 키스는 정혁의 말대로 멈출 기미도 없었다. 게다가 민우 역시 목숨처럼 지키던 우정의 선을 오늘 하루만은 봐주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관용을 베풀어 정혁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할 뿐이었다. 정혁의 손이 민우의 목선을 더듬었다가, 뺨을 매만졌다가,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길 반복했다. 키스 도중 벽에 거칠게 밀쳐지면 벽에 맞닿은 문신때문에 부은 부분이 부딪쳐 민우가 절로 작게 신음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더 자극을 받은 정혁이 민우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꼽 부위를 문질렀다. 민우가 화들짝 몸을 떼어냈고 맞붙어있던 입술도 떨어졌다. 붉게 부어오른 민우의 입술을 보며 정혁은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는 아직까지도 현관 벽에 기대있는 민우의 손을 잡아 창가의 침대쪽으로 이끌었다. 미색의 등을 약간 낮추어 더 부드러운 음영이 진 민우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침대에 앉혔다.
「만져봐.」
민우의 앞에 무릎을 꿇은 정혁이 멍한 아이처럼 넋이 나간 민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맨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민우의 유독 작은 손이 그대로 스륵 가슴을 타고 내려갔다. 그러더니 와락 정혁의 목에 두 팔을 감고는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댄다. 아이 같아…. 정혁은 민우의 등뒤로 팔을 둘러 끌어안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문신한 부분이 눌렸는지 또 한껏 인상을 쓰길래 엎드리게 하고는 자신도 그 옆에 엎드려 누워서는 민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침대는 쓸데없이 푹신해서 금방이라도 눈을 감으면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우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정혁은 손가락으로 민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민우가 정신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혁의 손가락은 유독 또래 남자애들에 비해 길고 가늘었다. 정혁의 몸에서 유일하게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부분이 손이었다. 그 길고 우아한 손가락들이 부지런히, 하지만 분주하지 않게 자신의 얼굴선을 훑어간다고 생각하니 민우는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감은 눈 위로 정혁의 입술이 닿았다. 곧이어 입술은 콧잔등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입술로 미끄러져 온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민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입술 위를 맴돌다가 민우가 입을 열지 않자 의도를 눈치챈 정혁이 민우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윽, 뭐야- 이 새끼가.」
「네 얼굴, 지금 보니 예쁘다.」
「…지랄하지 마. 취했어?」
정말이야. 민우는 그 말이 너무나도 황당하고 우스웠는지 폭소를 터뜨렸다. 정혁은 멀건히 민우가 웃는 것만 바라보았지만 민우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형적인 소년의 뒤끝 없이 칼칼한 웃음소리, 하지만 싸늘한 잔향. 민우의 웃음소리는 그랬다. 어느 순간 허무하게 웃음소리가 그쳤고 민우는 자신의 맨 가슴 위에 입술을 가져가 핥고 있었다. 강아지가 핥아대는 것처럼 간지러웠지만 점점 녀석의 혀의 감촉이 간지러움을 넘어서 묘하고 선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지체하기도 싫고 참기도 힘들어져 민우의 맨투맨을 벗겼다. 하얀 몸이 드러났다. 늘 보던 상체인데도 이런 분위기에, 이런 곳에서 보는 건 정말 감흥이 달랐다. 슬슬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장난스러운 키스는 감히 하지도 못했다. 민우 역시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정혁의 눈동자가 한순간 탁해졌다.
아직 덜 자란 남자의 몸 같았다. 팔과 가슴, 배에 섬세한 근육이 있어 탄탄한 몸매였지만 미성숙한 부분들이 공존했다. 정혁은 민우의 목을 한 손에 잡아보았다. 마치 목을 조르려는 사람처럼 손에 약간 힘을 주었더니 민우가 턱을 치켜든다. 해보라는 것처럼 당연하고 거만한 얼굴로. 다시 손에 힘을 빼 손을 그대로 미끄러트려 두드러진 쇄골을 만지다가 단아한 가슴위를 더듬었다. 간지러웠는지 민우가 다시 짧게 웃었다.
「이민우, 너 가슴선도 예쁜데?」
곧바로 민우의 발길질에 침대 저편으로 굴러버렸지만 정혁은 끝까지 능글대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넘어진 그대로 정혁은 민우를 위에 앉힌 채로 다시 키스를 했다. 민우의 앞머리가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져 간지럽힌다. 결좋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 살짝 끌어당겼다. 그러는 바람에 누워있는 정혁의 위로 완전히 엎어진 민우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정혁은 그대로 민우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서는 목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정혁의 오른손이 느슨해진 바지 허리춤으로 들어와 엉덩이 사이를 배회했다.
「많이 아파?」
점점 대범해지는 정혁의 손길에 흥분 반, 죄책감 반, 대책없이 혼란스러웠다. 정혁이 아주 조심스레 붕대 위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아니. 민우는 거짓으로 대답했다. 문신한 부위는 바지의 면이 스쳐도 아찔하게 아팠다. 더욱이 정혁의 조심한다고 하는 손길도 스산한 통증을 제공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아프지 않다고 대답했다. 붕대한 부분을 조심하면서 정혁은 민우의 바지와 브리프를 벗겼고 민우도 정혁의 것을 벗겼다. 룸 안이 쾌적한 온도이긴 했지만 갑자기 나체가 되자 한기가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푹신한 침대 시트를 들어 정혁은 민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떨려?」
엎드린 자신의 위에 올라타 등골을 따라 키스를 하던 정혁의 말이 언뜻 무슨 소릴까 했지만 민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민우의 반응에 갑자기 폭주한 정혁이 민우의 엉덩이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순간 민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베개위로 아예 얼굴을 묻어버렸다. 생각보다 귀여운 반응에 정혁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개를 빼앗아 버렸다. 홍조가 도는 민우의 양 뺨이 눈에 들어오자 정혁은 민우를 끌어안았다. 살이 맞닿고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고.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네 심장박동을 느끼고 내 품안에 안긴 널 보니깐 정말 널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져. 이 하루가 지나면 어떻게 견뎌낼까. 이렇게 좋은데 널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어떻게 널 친구로만 마주할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히고 코끝이 아려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아랫배 부분이 간질거릴 정도로 아찔해진다.
「미친 새끼, 너 섰어.」
하지만 곧바로 민우의 일격에 감상은 깨어지고 흥분한 몸뚱아리부터 달래야 했다.
「당연한 거야. 난 네 생각 하면 이렇게 돼. 네가 내 몸에 부대끼고 안고 키스하는데 내가 목석이 아닌 이상 초연할 수 있을 것 같아?」
정혁의 건강한 신체반응에 민우는 다소 당황했다. 저런 반응이 정말 자신 때문에 나왔단 말이 거의 충격이었다. 정혁이 자신을 좋아하고, 그의 말대로 사랑한다는 것도 알겠지만 막상 이렇게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증명까지 해보이다니 위험한 선을 확실히 넘는구나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달까. 그제서야 지금 둘이 하는 것이 다른 사람, 특히 혜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행위인가를 실감하게 됐다.
「내가 널 불행하게 만들었어.」
순식간에 어두워진 얼굴로 민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 난 네가 있어서 행복해. 제발 병신같은 소리 집어 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민우의 얼굴에 정혁은 다시 심장 부분이 수십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려왔다. 제발 자학하지 마, 네 그런 표정, 네 그런 말들이 날 얼마나 한심한 놈으로 만드는지 알아?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난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이 된 것 같다고.
「오늘만, 오늘만이야. 하루가 지나면 다 잊어. 이 감정도, 느낌도, 공유했던 것들도 잊어. 널 사랑한다는 이민우도 지워버려. 네가 그럴 수 있다고 약속해야 난 오늘밤이 편해. 제발.」
민우는 정혁을 눕히더니 그 위에 올라타 정혁에게 키스를 시작했다. 못 잊어, 널 어떻게 잊어, 절대 잊지 못해. 그딴 약속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정혁은 약한 소리만 하는 민우의 어깨를 붙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민우의 처연한 키스의 느낌에 그만 이성이란 것은 고이 날려보냈다. 그리고 오로지 이민우란 녀석과 그에 대한 감정, 그리고 지금 이 행위에 몰입을 결심했다. 민우의 키스는 서툰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능수능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돌적이었고 끈적한 동시에 애처로웠다. 민우가 입술을 떼더니 정혁의 목을 핥아가며 입맞춤을 퍼부었다. 무섭도록 야한 느낌인 민우의 집중한 표정에 거의 넋을 잃은 정혁은 그저 민우의 애무에 솔직하게 반응해주었다. 정혁의 다리를 벌려 허벅지 안쪽을 핥아가며 애무하는 민우를 내려다보던 정혁은 민우가 주저없이 다리 사이로 입술을 가져다 대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얼른 민우를 일으켜 앉혔다.
「뭐가 이리 능숙해?! 너 지금 얼마나 야한 줄 알아?」
버럭 언성을 높인 정혁의 말에 민우는 어이없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오럴섹스는 섹스가 아니래. 클린턴이 남긴 명언 중 하나. 다행이지? 그것까진 해줄 수 있어. 왜냐면 우린 같이 자면 안 되니깐.
너한테 난 창부여도 좋아, 네가 원하면 못 해줄 것도, 못 내줄 것도 없어. 이깟 하룻밤 나도 너랑 하고 싶어, 네가 날 원한다니깐 더 그래. 하지만 오늘 지나고 나면 괴로워할 네가 걱정돼. 혜성이한테 네가 죄책감 갖을 것도 두려워. 너랑 자도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어, 원래 네 말대로 독한 놈이니깐. 하지만 넌 못 그래. 나랑 해놓고도 너 괜찮을 수 있어? 아니, 넌 못 그래.」
「씨발……! 이민우, 우리 죽자. 차라리, 같이 그만 살자!」
결국 정혁은 흐느끼고 말았다. 말수도 없는 녀석이 길게, 최대한 무덤덤하게 뱉어낸 말들은 어쩌면 현실을 가장 냉정하게 지적한 것들 투성일지도 몰랐다. 너무 가슴 저리게 느껴버렸다. 넌 어째서 이런 순간에도 저런 생각들을 할 수가 있지? 한 번이라도 네 자신만 생각해서 이기적일 수 없어? 제발, 이민우. 너 때문에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정혁을 보며 민우도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울지 마. 계집애같이 질질 짜지 마.」
잔뜩 흔들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주제에 울지 말라니 웃기다. 정혁은 눈물을 닦아주는 민우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키스했다. 올려다본 민우의 양 뺨도 젖어있었다. 또 저 눈동자, 공허하게 빛을 잃은 민우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정혁은 다짐했다. 다신 널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을게. 다신 이렇게 이기적으로 널 가지려 하지도 않을 거고, 네가 원하는대로 해줄 거야. 오늘 하루 네가 나한테 양보했으니깐, 이제 나 평생을 너에게 양보할게.
「피곤하다, 정혁아. 잠이 와, 어쩌지? 나 너한테 그거 해주고 싶은데.」
지친 몸을 정혁에게 기대며 민우는 눈을 감았다. 정혁은 민우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하고 땀으로 촉촉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됐어, 네가 하도 갑자기 안 섹시하게 굴어서 가라앉았다. 그냥 자. 이대로 끌어안고 자자. 편해? 문신한 데 아프니깐 못 눕잖아.」
대답이 없다. 하루가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허망하게도 민우는 벌써 잠이 든 것이었다. 정혁의 몸에 완전히 포개지게 엎드린 민우가 최대한 편하도록 자릴 잡은 정혁은 시트를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금방이라도 맘만 먹으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바로 이렇게 맞닿은 몸에서는 아직도 열이 나는데, 감정도, 주체 못할 열망도 가라앉혀야 했다. 그게 네가 그렇게 소중해하는 현실이고 우정이니깐.
네가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잠든 밤에도 꿈엔 네가 나올까?
다짐하고 작정한 하루였지만 역시 우린 사랑하지 못해.
이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억울해.
대체 얼만큼을 잤는지 모를 만큼 한참은 잔 기분이었다. 눈꺼풀은 더디게도 뜨여졌고 상황파악도 그만큼이나 더디었다. 민우는 싸늘하게 느껴지는 기운에 주위를 둘러보았고 커다란 침대 위에 혼자 자신이 누워있다는 사실과 창 밖의 해를 봐서는 12시는 넘었단 것을 알았다. 욕실에서 물소리도 나지 않고 침실에도 없다. 정혁은 가버린 걸까.
테이블 위에 잘 개어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를 보고 민우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갑자기 바닥에 널부러진 자신의 옷을 정성스레 개키고 있는 정혁의 모습이 상상이 돼버렸다. 뭐야, 이 기분. 어제 그렇게 잠이 들어 버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것도 이제서야 일어나다니, 왜 날 깨우지 않았을까. 한참을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일단 씻어야겠단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키자 허리와 엉덩이 부분이 따가왔다. 아, 문신. 민우는 침대 옆의 전신 거울 앞에 등을 보이고 서서는 천천히 붕대를 떼어보았다. 떼어질 때마다 거즈가 닿아 화끈거려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고 정혁이 들어왔다. 민우는 얼른 침대 시트를 들어 허리 아래에 둘렀고 정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천천히 민우 쪽으로 걸어왔다.
맙소사, 이렇게 어색할 수 있을까.
「잘 잤어?」
정혁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물론 그래야 하는 것이고, 그랬기에 다행이지만. 민우는 여전히 멍했다. 왜 정혁을 이런 식으로 의식해 버린 건지에 대해, 무엇보다 그것이 불만이었다. 분명 자신은 정혁이 들어옴을 알자마자 시트로 몸부터 가렸다. 맘에 들지 않았다. 정혁은 무언가가 든 쇼핑백을 내려놓고는 여전히 거울 앞에 서있는 민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하체를 가린 시트를 살짝 치우게 했다. 거즈를 떼다 말아 문신한 부위가 거의 드러나다시피였다. 정혁은 민우가 그것을 확인하려던 중이었음을 알고 아프지 않도록 거즈를 떼어내고는 민우에게 거울을 돌려 보여주었다. 붓기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남자 말대로 완성되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할 듯 했다. 민우는 여전히 말이 없이 등뒤의 거울을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어제 밤에는 차마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엉덩이가 남자 같지 않게도 귀엽고 섹시하다. 더욱이 심플하고 에스닉한 문신은 그 매력을 배가하고도 남았다. 맙소사, 왜 하필 이런 부위야.
「절대로 다른 새끼들한테 보여주지마.」
민우는 잠깐 웃고는 만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아니면 무엇이 저리도 어리둥절한 것인지 민우의 표정은 한껏 풀어져 있다. 그게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연약한 감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정혁은 마음 한 켠이 불안했다. 문신 부위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엄지 손가락 크기의 바코드 문양아래 라틴어체 문자를 읽어보기 위해 노력해본다. 왜 이걸 궁금해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K…a…d…d…i…s…h…, 카디쉬….
「갈아입을 속옷하고 약이랑 붕대 사왔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죽도. 먼저 씻을래? 거기 물 닿지 않게 조심해서 씻어, 힘들면 내가-」
「네가…, 가버린 줄 알았어…….」
쇼핑상가에서 사온 것들을 꺼내놓으며 말하던 정혁은 민우의 말에 분주하던 행동을 순식간에 멈춰버렸다. 약간 잠긴 목소리였다. 그리고 희미한 안도와 혼란이 묻어난 말. 그 말을 하고 민우는 맨 몸으로 욕실 쪽으로 향하더니 쾅 문을 닫아버렸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렸다. 생각하지 못했어! 감히 그것까지 난 생각지 못했어. 널 위해 무엇을 해줄까 생각하기에 급급해서 고작 이런 것들을 사러 나갔는데, 그 순간 마저도 혼자 일어나야 했던 네 기분을 생각하지 못했어. 젠장. 어떤 기분이었을까.
끊임없이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 앞에 서서 정혁은 몇 번이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떼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얼마 후 민우는 얌전하게 밖으로 나왔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려주며 정혁은 민우를 끌어안았다. 민우는 잠자코 안겼다. 이것까지, 이젠 얌전히, 사심없이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끝. 너와 나의 어설픈 외도는 그걸로 끝이어야 해.
정혁은 정성껏 거즈를 새로 대주고 붕대까지 꼼꼼히 붙여준 다음 옷까지 입혀주었다. 민우는 말 잘 듣는 아이 같았지만 다른 면으로는 말 못하는 아이 같았다. 정혁은 그런 민우 앞으로 장미 다발을 내밀었다. 내내 무표정했던 민우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장미꽃 아흔 아홉 송이. 백 송이를 샀지만 오는 길에 한 송이를 빼버렸다. 꽉 찬 숫자가 기가 막히기도 했고, 어차피 우리 사랑은 불완전했으니깐. 장미 다발은 민우의 품에 한가득이었다. 온통 붉은 꽃송이들에 파묻힐 것 같은 민우의 얼굴에까지 붉은 것들이 물들었다.
「꽃을 받는 건 처음이야. 쪽팔려.」
「사랑해.」
「………….」
「사랑해, 이민우.」
「뭐라고 대답해줄까.」
「……내가 싫다고 말해.」
「그래, 차라리 네가 싫다면 좋겠어. 먼저 집으로 가, 난 나중에 돌아갈 거야. 약속한 하루는 이걸로 끝이야. 만족했든, 못했든……, 이젠 끝났어.」
끝났어. 그 잔인한 한 마디에 그래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정혁의 가슴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무심하게, 아니, 무심한 척 말하고 있는 녀석도 분명 자신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속이 쓰렸다. 하지만 다짐은 다짐이었다. 더 이상 민우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 따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정혁은 여전히 장미다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민우의 뺨에 살짝 키스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리고 안녕. 이따 보자. 아니, 학교에서 보자.
정혁의 비장한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정혁이 나가고, 정혁이 반 정도 보이고, 반의 반 정도 보이고, 문이 닫히고 그리고 이젠 보이지 않는다.
그제서야 그동안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씨발! 지지리도 궁상맞은 사랑! 다신 이따위 사랑 없어. 다신 감정 따위 놀음에 놀아나지 않을 거야. 씹할 새끼. 정혁에게 처음 받아본, 애써 무심한 척 했지만 감동스러운 장미다발 위로 통탄스러운 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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