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e a d r o s e
Another RicMin part of ROADS
Written by birdie
2.
『너에 대해 아는 게 백 개라면, 모르는 건 이백 개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훗, 뭘 모르는데? 내가 알기론, 넌 나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데.』
『이를테면…, 그 때 왜 그렇게 울고 있었던 거야?
내가 널 짝으로 뽑았을 때 말야. 네 얼굴이 눈물 투성이었어.』
『아…. 기억이 안 나.』
『바보냐, 이민우.』
『아마도 부모님이 이혼 결정을 하고 엄마가 미국으로 가버려서 가 아닐까.
내가 그 즈음에 그렇게 울었을 일은 그것 밖에 없어.』
『의외네. 네가 우는 걸 본 적은 정말 드문데.』
『그럼 나도 궁금한 거. 그 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름만 겨우 알던 날 짝으로 뽑은 거냐.
애들이 너 변태라고 난리였잖아.』
『글쎄-. 그 때부터 네가 좋았었나 보지 뭐.』
중간고사가 끝나도 수능이 코 앞이라 놀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딱히 학구열에 불타오르는 쪽은 아니었지만 정혁과 함께 좋은 학교에 가고 싶었다. 같은 반인 선호에게 붙어 진과 함께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혜성의 긍정적인 변화에 그의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연애가 좋긴 좋은가 봐’라는 헛소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혜성은 그렇게 지껄이는 친구들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정혁이 전처럼 겉돌지 않고 자신과 함께 독서실을 다니는 것도 최근 혜성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였다. 눈에 띠게 고분고분해진 정혁은 잠든 사자처럼 평온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최근 들어선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는 눈치였다. 일요일 오후, 정혁이 독서실로 나오지 않자 혜성은 간식거리를 사들고 정혁의 집을 향했다.
「뭐야 그 몰골은, 문정혁 아.저.씨. 」
어제 이후로 밖으론 나가지도 않은 건지 면도를 하지 않는 턱이 까칠한 정혁이었다. 정혁의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혜성을 반기는 것은 매캐한 담배연기다. 얼마나 피워댔는지 불이라도 난 것 같다. 기가 차서 혜성은 정혁을 노려보았다.
「혜성아, 신혜성.」
「왜. 너 어디 아파? 왜 그래.」
「이리 와봐, 키스 좀 하게.」
나른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작게 중얼거리는 정혁이 못마땅했지만 혜성은 잠자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방안이 엉망이다. 청소 좀 해줄까 싶었지만 문정혁 하는 짓이 괘씸해져 그런 생각은 접어버렸다. 몸을 일으키는 것 조차도 귀찮은지 정혁은 혜성의 팔을 잡아 자신의 옆에 눕게 만들었다.
「대낮부터 힘 빠지게 왜 누워있어? 머리 아프면 나가서 바람 좀 쐬던가, 야-」
종알거리는 작은 입술이 얄밉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정혁은 고개를 돌려 입을 맞췄다. 조용하니깐 얼마나 좋아? 담배 향이 묻어나는 텁텁한 혀,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둘만이 있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행위라는 것 자체가. 입술을 맞대고 있으면 따뜻하다. 그 나른함에 입을 열면 입술보다 더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것이 섞여든다. 여전히 어딘지 민망한 행위였지만 혜성도 차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정혁은 유난히 키스를 좋아했다. 이런, 그런데 거기서 이민우 생각이 나버렸다. 문정혁, 키스, 이민우. 이게 대체 웬 해괴한 연상작용이란 말인가. 딴 생각에 그만 정혁의 혀를 살짝 깨물어버리는 우를 범한 혜성이 얼른 입술을 떼버렸다. 혀가 깨물리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정혁은 아예 웃고 있다.
「뭐야 그건? 새로운 테크닉? 가끔 그렇게 깨물어주는 건 나도 환영이지만 너무 아프게는 하지 말아줘. 난 누구처럼 매져가 아니거든.」
부스스 몸을 일으킨 정혁이 낄낄거리며 그런다. 누구처럼 매져? 그게 이민우야? 우리 둘 다 이민우 생각하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야 늘 넘쳐나지만 그런 것들을 다 풀어놓으면 결국 위태로운 선만 그어놓을 뿐이란 걸 알고있다. 정혁은 한 번도 확신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적어도 혜성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늘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라도 중심을 지키고 서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중했다. 혜성은 가만히 정혁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으로 집어넣었다.
「민우… 만났어?」
「………….」
「잘 지낸대? 한동안 안 보였었는데.」
「…모르겠어. 난 정말….」
아무렇지 않다가도 이름 석자에 대번에 표정이 바뀌는 정혁을 보면서 드는 감정이란 것은 생각할 수록 불편하고 암담한 것 투성이다.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해줄 수도 없었다. 민우를 만난 것일까, 무슨 대화를 했을까, 대화- 이민우는 정혁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까. 대체 어떤 말을 해준 걸까.
「난 그냥 네가 좋은 거야.」
난데없이 흘러나온 혜성의 말에 정혁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혜성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란 걸 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 힘들고 가증스러웠다. 정혁은 입고 있던 얇은 티셔츠를 벗고 방을 나섰다.
「…네가 좋아서 네 주변도 다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뒤돌아본 혜성은 무표정했지만 충분히 애달픈 얼굴이기도 했다.
「샤워 좀 하고 올게. 우리 데이트 하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재밌는지 혜성은 연신 길바닥에 우수수 떨어져있는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용케도 솜사탕을 어딘가에서 발견하고 사온 정혁의 정성이 가상해서 평소 땐 부풀린 설탕 덩어리라고 싫어하던 거지만 열심히 뜯어먹었다. 자기 머리보다도 큰 분홍색 솜사탕을 들고 집게 손가락과 엄지로 야곰야곰 뜯어먹는 혜성을 신기한 생물체 보듯 정혁은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하게 생겨먹었어, 신혜성. 너 지구인 아니지? 어떤 미션을 받고 지구로 보내진 건지 어서 말해봐.」
「우욱, 썰렁해. 어? 금방 이마에 물방울 떨어졌어.」
혜성이 하늘에서 물방울 하나가 자기한테만 떨어졌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가 도대체 맞는 날이 없다 요즘은. 넓은 공원이라 딱히 금방 피할 곳도 없는데 비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솜사탕을 들고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혜성의 손목을 잡고 그나마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 정자나무 아래의 벤치 쪽으로 내달렸다. 헉헉 대면서도 정혁을 따라 달려온 혜성은 이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더니 한껏 인상을 썼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고양이 얼굴을 한 혜성을 보다가 정혁도 혜성의 손에 꾹 쥐여진 나무젓가락,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분홍의 솜사탕으로 시선을 옮겼다.
「징그럽다.」
빗물에 녹아내린 설탕으로 끈적거리는 손을 밖으로 뻗어 비를 맞게 하며 혜성이 말했다.
「애초부터 부풀려진 게 별 수 있겠어.」
「뭐? 문정혁, 언제부터 그런 염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거야? 너 지금 표정 무서워.」
사치스러운 감정. 처음부터…, 누가 먼저 시작해서 어떤 경로로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저렇게 망가져버린 솜사탕처럼 허물 좋은 이 감정도 거품이 빠지고 나면 흉측한 형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지도 모른다. 두려운 것은 결국 그것인가? 드러날 실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진실일 지도 모르지만.
차가운 비를 맞아서 그런지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잠깐 퍼붓고 말 소나기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쩐지 빗방울이 가늘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혜성의 얼굴은 10월 초의 차가운 비에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 정혁은 덜덜 떨며 팔짱을 낀 혜성의 어깨를 안고 먹구름이 몰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혜성이 젖은 머리를 털더니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한참이 지나도 매정한 가을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퍼부었다.
열쇠가 열쇠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빗나가고 있었다. 민우는 비에 젖어 미끄덩거리는 손바닥 안의 열쇠를 다시 꾹 쥐고 밀어넣었다. 젠장. 또 실패. 어느 순간 등뒤에서 차가운 온기가 느껴지더니 자신의 손으로 다른 손이 포개져 열쇠는 구멍 안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달캉. 현관문이 열렸고 뒤를 돌아보자 현관의 자동센서 등으로 비에 젖은 생쥐 꼴의 정혁이 보인다.
「통금시간이 지났어, 이민우.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기나 해?」
「네가 이 시간에 여긴…. 뭐야, 비 맞고 그러고 있었어?! 이 미친 새끼!」
「정확히 여기서 2시간 25분을 기다렸어. 비 맞고 있으면…, 네가 들여보내줄 거 같아서.」
멍청한 소리나 내뱉으며 흐리게 웃는 정혁의 얼굴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기가 막힌 민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있는 정혁이 집안으로 들어가도록 비켜주었다. 덜덜 떨리는 어깨가 눈으로도 보일 정도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랬을까.
「뜨거운 물 받아서 샤워해. 씨발,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민우. 넌 내가 무슨 소릴 해도 이해하고 들어줄 거지? 」
또 어떤 머저리 같은 소릴 하려고 저럴까. 새삼 두려워진다. 한껏 인상을 쓴, 종이장 같이 구겨진 민우의 얼굴을 보며 정혁은 민우의 손을 잡았다. 자라지 않았어, 넌 늘 그대로야. 어렸을 때도 네 손을 잡으면 이렇게 내 긴 손가락에 감긴 채였는데, 어리석은 난 그것 마저 좋았어. 네 손을 이렇게 잡고 있으면 마치 네 전체를 내가 쥔 것 같아서, 그 우스운 장악력 하나에 마음이 놓이곤 했는데. 알았을까? 알고 그런 거였을까? 넌 내가 손 잡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었지.
「…사랑하고 있어….」
주어고, 목적어고 다 발라내고 뭉뚱그려 내뱉어진 강렬한 한 마디에 민우는 정혁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렇게 말하는 정혁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하고 건조한 걸로 봐서는 크게 염려할 것 까진 없다고 위로해보지만. 정혁은 괴로운 한숨을 길게 쉬고는 축축한 스웨터를 벗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초연한 민우의 얼굴은 표정없는 인형 같았다. 두려워, 무엇이 너로부터 감정을 빼앗아가고, 표정을 잃게 만든 건지- 그게 나라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어서 두렵고 미안해.
「널 말하는 거 알잖아.」
「이러지 마. 나 먼저 씻어야겠어.」
한심하다. 도망쳐온 곳이 겨우 욕실인가. 멍하게 거울을 들여다봤다. 정혁이 저럴 때마다 수없이 많은 생각이 뒤엉켜버린다. 사고는 녹슬고 헐어버린지 오래인데 감정은 자꾸만 다가서라고, 안아줄 그를 반기라고 터무니없는 종용을 한다. 안 그래도 혼자 가만히 있어도 그런 생각들로 힘들 판에 정혁은 자꾸만 나타나서 부채질을 한다. 매번 자신에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고 감정을 청하는 정혁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갈등에 패닉상태로 접어들고 마는 민우였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옷을 입은 채 물줄기를 맞고 있었단 걸 알고 민우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습관처럼, 그리고 당연하게도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정혁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버린다. 매너없는 새끼.
「아, 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길래…물소리만 나고….」
「내가 죽기라도 했을까봐? 멍청한 새끼.」
「멍청한 건 너 아냐? 옷을 입고 샤워하게.」
무안한 모양인 정혁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농담조를 그러길래 민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샤워부스에서 나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물기에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민우의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내주자 정혁은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추를 서너 개 풀다 말고 민우가 그런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더 무안해진 정혁은 고개를 괜히 욕실 문 쪽으로 돌려버렸다. 순간적으로 그런 정혁이 우스워 민우는 다시 소리죽여 웃었다. 전에 목욕도 같이 하고 장난으로 서로의 알몸 정도는 본 사이인데 이제 와서 저런 표정이라니. 이렇게 다 자라고 난 이후로는, 그리고 감정이란 것이 폭로된 이후로는 그런 적이 없긴 했지만.
「나가, 먼저 씻고 나갈게.」
「어….」
멍한 표정의 정혁이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이며 욕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민우는 그런 정혁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면…, 같이 할까. 너, 너무 많이 젖어서….」
「난… 자신이 없어.」
민우는 젖은 머리를 정혁의 등에 대고 팔을 허리에 둘러 안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체온에 정혁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 정혁은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민우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내쳐질까봐 차마 잡지도 못했다.
「나 만큼 자신이 없냐? 결국 널 이렇게 안은 건 나야. 내 눈 앞에 나타나면….」
「이민우, 우리가 왜 이래야 해. 그냥 느껴지는 대로 행동하면 안 돼? 왜, 왜 안돼?」
욕조 안의 물이 넘쳐 흐르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물을 잠글 생각은 못했다. 한 번 터진 절규는 그 시도에 용기를 얻고 뒤돌아 민우의 얼굴까지 잡는 것을 성공시켰다. 민우는 고개를 들려 하지 않았지만 정혁은 민우의 양 뺨으로 손을 가져가 고개를 들게 했다. 좌절로 채워진 공허한 눈동자가 축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대답해줘, 제발. 네 마음 속에 누가 있고, 머리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줘. 난 이제 전혀 알 수가 없어. 널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문정혁은 이제 없다고!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난 이젠 모르겠어! 내가 좋아? 날 사랑해? 젠장!」
「난 쉽게 변하지 않아. 네가 싫어서 그동안 피했다고 생각할 거 없어. 널 보는 게 힘들었을 뿐이고.」
「하…, 나 어떻게 할까.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혜성이한테 잘 해줘. 널 들인 게 실수였다. 아직 정리되지 않았어. 그냥 전처럼 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냐. 젖은 옷 갈아입고 나가줘.」
민우가 애써 뱉어내기 힘들 말을 꺼내놓자마자 정혁은 민우의 어깨를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욕조에서 흘러 넘친 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발에 와 닿는 뜨거운 물, 온통 증기로 가득차 뿌연 욕실 안, 덩달아 힘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정혁은 진심을 말해주지 않는 민우의 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생각지 못한 폭력에 벽을 타고 민우는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원통함을 삯히지 못하고 씩씩대던 정혁은 이젠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물소리를 멈추게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민우의 앞에 앉아 얼굴을 가려버린 손을 치워냈다.
「왜 맞고도 가만 있어, 이 새끼야!!」
「맘대로 해, 네 맘대로. 난 관심 없어, 씨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 거면 그래 보라고!」
「고개 들어! 마음대로 하라고!? 난 네 마음을 원해! 네 마음 한가득 나로만 채워졌으면 좋겠어! 유치하냐? 늦어서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씨발. 대체 왜 답지 않게 성자인 척 굴어?! 네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난 네 몸이라도 가지고 싶어! 내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도 모르겠어?!」
빌어먹을. 홧김에 내뱉어놓고 보니 그간 친구로서도 저런 류의 심하게 모욕적인 말을 해본 적 없는데, 지금 이민우에게 저따위 소리를 지껄인 자신의 입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우는 정혁에게 달려들었고 미끌거리는 욕실 바닥에서 정혁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크지도 않은 욕실 안에서 정신없이 민우에게 맞다가도 실소가 터졌다. 그것보다는 울고 싶은데 대체 왜 눈물이 나와주지 않는 걸까. 어느 순간 민우가 털썩 자신의 위로 쓰러졌다. 정혁은 욕실 바닥 위에 누운 상태로 민우를 끌어안았다.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은 민우는 고개도 들지않고 주먹으로 애꿎은 욕실 벽을 내려쳤다. 순간적으로 놀란 정혁이 민우의 주먹을 감싸 쥐었지만 벌써 손에서는 피가 진득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파, 새끼야. 날 이렇게 패다니, 난 네가 날 때리지 못할 거라고 매번 착각을 한다.」
정혁의 말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아려옴을 느낀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정혁은 자신의 주먹을 양 손으로 감싸안고는 찢어진 손등 부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정혁의 혀가 닿은 손등의 상처에서는 고통 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너로부터 무감각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보여도 내 심장이 멍청할 수 있다면, 널 만져도 내 손이 널 느낄 수 없다면….
「……이민우?」
뿌연 수증기 때문에 눈이 어떻게 됐는지, 민우의 눈동자가 붉게 보이더니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민우의 눈물에 정혁은 얼른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나려는 민우의 어깨를 잡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어렸을 적 이후로 민우는 한 번도 자신 앞에서 운 적이 없다. 부모님 문제 때문에 힘들어도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지독한 녀석이었다. 정혁이 민우의 뺨을 손으로 감싸자 민우는 고개를 돌려 몸을 일으키려 했다. 찢어진 손등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 정혁이 입고있던 흰 티셔츠에 얼룩을 만들어 버렸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주면 안 돼?」
「……덥다.」
애잔해진 가슴으로 정혁이 민우의 턱을 잡아 눈을 맞추고 겨우 진지한 대사를 쳤는데 엉뚱하게도 그 순간 민우는 덥다고 말해 버렸다. 그 반응에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오히려 정혁이 허둥대는 사이 민우는 정혁의 몸 위에서 빠져나와 다시 샤워기를 틀고 마저 셔츠를 벗었다.
「뭐 해? 씻으려면 옷을 벗어야지 임마.」
커다란 눈만 꿈뻑거리는 정혁의 앞으로 가 민우는 정혁의 셔츠 끝을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올려 벗겼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브리프까지 벗겨내는 민우를 보다 참다 못한 정혁은 민우의 팔목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이젠 확실히 알겠어. 그렇게 해주면 돼?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서로 감정 모르는 걸로 할까? 그럼, 이렇게 어설프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지 마.」
「………….」
고집이 세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한 번 결심 굳힌 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는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혁은 민우가 두려웠다. 녀석에겐 감정이란 것이 사치라는 것, 상실감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억지스러워도 친구여야 한다는 것도.
「대신…, 우리 하루만 사랑하자.」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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